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존재 이유에 대한 새로운 질문
- 나를 넘어 너에게 -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오랫동안 ‘나’ 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되풀이 되어왔다.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한다.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바뀌는 순간,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 들풀도 존재 이유가 있는데, 사람이 없을 수 있는가? 들길에 피어난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에도 존재 이유가 있다. 그 풀은 바람을 식히고, 흙을 붙잡고, 작은 벌레의 그늘이 된다. 그 역할이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그것이 있는 덕분에 세상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가?
왜 많은 이들이 “나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존재 이유를 ‘나’ 안에서만 찾기 때문이다. 존재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나의 존재 이유는 “내가 무엇을 받는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서 완성된다.
지금 세상은 너무 쉽게 말한다. 이기심이 만든 세상이 지배한 듯 하다. “나부터 먼저 챙겨라.” “내가 행복해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논리가 지배적인 흐름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진정한 행복이란 나만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행복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대개 누군가를 도왔을 때, 내가 준 것이 되돌아올 때, 누군가 웃는 얼굴을 보았을 때였다.
행복은 나눌 때 완성된다. 그래서 이기심(利己心)이 아니라 아타심(利他心) 이 우리 삶을 살린다. “내가 잘 되기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남을 배려하는 것”이 진짜 인간다움이다. 존재 이유는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제 존재 이유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다. 행동이 필요하다. 내가 가진 시간, 재능, 능력, 관심,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도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 될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많은 기업은 “고객 가치”를 외친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기업만이 소비자로부터 존중을 받으면서 살아남는다.
개인의 삶도 동일하다. 존경받는 삶은 받아들이는 삶이 아니라 건네는 삶이다. 나를 넘어 너에게 가 이 시대의 새로운 존재론이다.
이제 묻는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그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내가 있어 세상이 얼마나 더 따뜻해지는가?” 이 질문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방향을 찾는다. 삶의 무게와 혼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존재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결론은 아타심이 만든 세상,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세상은 점점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지만, 진짜 위대한 문명은 이타심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내가 잘해서 혼자 살아남는 문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함께 살면서 행복해지는 문명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믿는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넘어 너에게 있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고, 사회의 길이며, 우리가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할 유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