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전쟁 3~4화 우리 민족의 전쟁3. 고구려와 당나라의 여-당 전쟁 고구려-당나라 전쟁은 645년에서 668년까지 벌어진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이다. 수문제 양견이 건국한 수나라는 수양제 양광의 폭정과 여-수 전쟁으로 인해 멸망을 자초하여 당고조 이연이 수공제 양유로부터 양위를 받아 당나라를 건국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당나라에 호의적인 태도로 전쟁을 방지했다.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하여 고구려 침략을 준비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강경정책을 펼쳤다. 여-수 전쟁이 끝난 지 30년 만에 여-당 전쟁이 시작됐다. 1차 여-당 전쟁은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개모성, 백암성, 현도성, 비사성, 요동성 등을 차례로 함락했다. 고구려 양만춘은 안시성에서 당태종을 막아냈다. 결국 당태종은 후퇴하고 647년과 648년에 소규모 공격을 하였다. 2차 여-당 전쟁은 660년부터 662년까지 당고종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평양을 직접 공격했다. 백제 부흥군은 왜국으로부터 지원받아 나당 연합군의 후미를 공격하자 당나라군은 퇴각했다. 3차 여-당 전쟁은 666년부터 668년까지 당고종이 평양성을
우리 민족의 전쟁 7~8화 우리 민족의 전쟁7. 고려와 명나라의 홍건적 침입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몽골국의 5대 칸이며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아담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난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지역과 재물, 영토를 소유한 사람이다"라고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서술했다.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자 황위 다툼이 일어났고 황제들이 라마교를 지나치게 숭배하여 국가 재정이 파탄났다. 궁핍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부과하자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백련교도인 홍건적이 봉기했다. 홍건적(紅巾賊)은 비밀결사인 백련교를 기반으로 하는 원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군이다.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 홍건적이라 하였다. 백련교는 이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상과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미륵신앙이 결합한 것이다. 홍건적은 원나라의 부마국인 고려에 대한 보복과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들은 임산부의 젖을 잘라 불에 구워서 먹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라고 김종서는 고려사절요에 기록했다. 홍건적의 1차 침략은 1359년 4만여 명의 병력으로 서경을 함락하고 양민 2만여 명을 학살했다.
우리 민족의 전쟁 5~6화 우리 민족의 전쟁5. 고려와 금나라의 고려-여진 전쟁 여진(女眞)은 만주와 함경도 지역에서 거주하는 숙신-말갈계의 유목민족으로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여진은 오랫동안 체계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거란에 복속되어 생활했다. 1104년 고려 윤관은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천리장성 밖으로 쫓아내고 동북 9성을 축조했다. 고려는 갈라수 전투에서 패배하고 2년 만에 여진족에게 동북 9성을 빼앗겼다. 1115년 완안아골타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대금(大金)을 건국하고 요나라를 공격했다. 금태종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을 멸망시켰다. 1127년 황족 조구가 강남에서 남송을 재건하여 고종으로 즉위했다. 조부 이자연은 세 명의 딸을 11대 문종에게 시집보내 문종의 장인이자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의 외조부이자 14대 헌종의 외증조부이다. 손자 이자겸은 차녀를 16대 예종에게 3녀와 4녀를 17대 인종에게 시집보내 예종과 인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조부이다. "지금 금나라는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
우리 민족의 전쟁 1~2화 우리 민족의 전쟁1. 고구려와 위나라의 여-위 전쟁 고구려-위나라 전쟁은 242년부터 259년까지 네 차례의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을 말한다. 고구려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설치한 한사군을 축출하고 부여, 동예, 옥저 등을 복속하여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지배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은 8대 신대왕의 아들이며 9대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고국천왕의 왕비이자 형수인 우씨와 모의하여 즉위했고, 형사취수제로 형수를 부인으로 삼았다. 아들을 태자로 삼아 형제상속을 부자상속으로 바꾸고 환도성으로 천도했다. 11대 동천왕은 10대 산상왕의 아들로 위나라 2대 조예(曹叡)와 함께 요동 지역에서 할거하던 공손씨(公孫氏) 세력을 정벌했다. 동천왕은 공손씨 세력이 무너지자 위나라를 기습 공격하자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역공했다. 고구려는 위나라와 3차례의 전쟁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을 잃었으며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남옥저에 이어 북옥저로 피신했다. 환도성은 평지성인 국내성과 함께 축성한 산성이다. 조조가 헌제를 후한의 황제로 옹립하고 삼분 천하의 삼국시대를 열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을
서일환의 역사야톡(12화) 공자(孔子)특집 9~10 공자특집9.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유자, 자장 공자는 노나라의 실력자인 계손씨 맹손씨와 불화로 13년 동안 천하를 주유했다. 공자가 천하주유 때 함께 했던 제자들을 공문십철이라 한다. 천하주유를 함께 하지 않은 증자(曾子) 유약(有若) 자장(子張) 등은 공문십철에서 제외됐다. 유약(有若)은 노나라 사람으로 자유(子有)를 말하고, 명나라 가정제가 유자(有子)라고 개칭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자(안회), 증자(증삼), 유자(유약) 3인 만이 자(子)로 존칭되는 성인이다. 공자가 사망하자 자장(子張), 자유(子游), 자하(子夏) 등이 유자(有子)를 공자 대신 모시자고 주장하자 증자가 비판했다. 유자는 공자와 행실이 닮았고 백성으로 하여금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생각한 인물이다. 자장(子張)은 진(陳)나라 사람으로 전손사(顓孫師)을 말한다. 공자가 행동이 지나치다고 평할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배우는 데도 열의가 있었고, 위급한 것을 보면 생명을 내걸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전손사는 ‘아름다운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귀한 지위를 가졌어도 잘한다고 여기지 아니하며, 남을 업신여
서일환의 역사야톡(11화) 공자(孔子)특집 7~8 공자특집7. 공문십철의 염경, 염옹, 염구 <염백우/염경(冉耕)> 염백우(冉伯牛)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백우(伯牛)이고 ‘염백우(冉伯牛)’ 혹은 ‘염자(冉子)’도 불린다. 염백우는 염옹(冉雍), 염구(冉求)와 형제이며 장남이다. 염씨 삼형제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자의 격려를 받으며, 학문적으로 성공하여 공문십철이 되어 일문삼현(一門三賢)으로 불린다. 염백우(염경)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덕행(德行)으로 안연(안회), 민자건(민손), 중궁(염옹)과 더불어 유명했는데 사람됨이 단정하고 정의로워 공자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했다. 염백우가 공자와 함께 노나라에 돌아와서 악질(惡疾)에 걸렸다. 그가 병을 앓을 때 병문안을 온 공자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를 망쳤구나, 숙명이로다! 이런 사람이 몹쓸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몹쓸 병에 걸리다니.”라고 장탄식을 하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공자보다 먼저 사망했다. <염옹/중궁) 중궁(仲弓)은 노나라 사람으로 염옹(冉雍)이라 한다. 공자의 제자이자 염백우의 동생이며 염구의 형이다.
서일환의 역사야톡(10) 공자(孔子)특집 5~6 공자특집5. 공자의 제자 ‘공문십철(孔門十哲)’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날 따르던 이들이 이제는 문하에 아무도 없구나.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뛰어났고, 언변은 재아와 자공이 뛰어났고, 정사에는 염구와 계로가 뛰어났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뛰어났다”. 공자는 ‘덕행’은 안연(안회), 민자건(민손), 염백우(염경), 중궁(염웅)이, ‘언변’은 재아(재여), 자공(단목사)이, ‘정사’는 염구(자유), 계로(자로)가, ‘문학’은 자유(언언), 자하(복상)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사기에 공자의 제자들은 3천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예법, 음악, 궁술, 마술, 서예, 수학에 뛰어난 재사(才士) 70명을 '칠십자(七十子)'라고 칭했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은 칠십자 중에서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한 10인을 말한다. 논어 선진편에 공자의 제자는 먼저 나온 자로, 자공, 유약 등 '선진(先進)'과 뒤에 나온 안회, 증자, 자장 등 '후진(後進)'으로 구분했다.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의 위패를 문묘에 모셨다. 공자가 사망하자 인(仁)과
서일환의 역사야톡(9) 공자(孔子)특집 3~4 공자특집3.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자사(子思)는 노나라의 유학자로 공자의 손자이자 공리(孔鯉)의 외아들로 공급(孔伋)을 말한다. 증자의 제자이며 맹자의 스승이다. 공자는 아들 공리의 죽음을 시작으로 안회, 자로까지 죽음을 맞이하면서 크게 상심했다. 자사는 3세에 아버지 공리(孔鯉)가 사망하자 할아버지 공자의 손에 양육됐다. 공자가 사망하자 곡부를 떠나지 않고 공자 학단을 이끌던 증자의 제자가 되었다. 증자의 철학은 자사를 통해 맹자에게 이어졌다. 자사는 성(誠)과 중(中)을 기본으로 하는 공자의 말씀을 모은 중용(中庸)의 저자이다. 중용은 예기의 한 부분이나 송나라 때 주자가 중용을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四書)에 포함했다. 주자는 성실함은 하늘의 도요, 성실해지려고 노력함은 사람의 도라고 하였다. 자사가 책을 집필한 이유는 '공자의 뜻이 후대에 가서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라고 서술했다. 유교에서는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를 정통으로 간주한다. 자사는 위(衛)나라의 재상을 지내면서 ‘위나라를 살펴보니 이른바 임금은 임금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다’라며 위나라를 경계했다. 위나
중소벤처뉴스 류권승 기자 | 특별초대석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 특별인터뷰 경기도 동탄시에 위치한 발광보드 전시장을 찾았다. 이곳을 찾아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를 만나 특별인터뷰를 구일암 발행인이 하였다. [특별초대석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 특별인터뷰 영상] 전시장을 들어선 순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곳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으며 우리의 생활 공간 및 사무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생각의 변화만 있으면, 얼마든지 에너지 절약 및 저 탄소를 실천 할 수 있는지를 느끼면 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경기도 동탄시 발광보드 전시장 1층 전경]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는 20년 동안 빛을 연구했다고 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지금 ESG를 부르짖고 있지만 저는 20년 전부터 ESG 경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20년 동안 에너지 절약 및 빛을 연구하면서 빛이라는 걸 왜 변화를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지금의 빛을 이용을 20%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빛이라는 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 사무실 및 생활 공간에 천장에 전구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인테리어 빛을
서일환의 역사야톡(8) 공자(孔子)특집 1~2 ●공자특집 1. 공자(孔子)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현, 산둥성 지역) 출신으로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기원전 551년 숙량흘과 안징재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 홀로 공자를 키웠다. 16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상을 지냈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정리하여 유학의 기초 경전을 정립하였으며, 이 예악(禮樂)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실현을 목표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실상 유학(儒學)의 창시자라 볼 수 있다. 노(魯)나라는 기원전 1046년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이 주공(周公)에게 내린 제후국으로 기원전 256년 초나라에 멸망했다. 주공은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이 동생으로 형인 무왕과 조카인 성왕을 보좌했다. 주공은 주례(周禮)와 의례(儀禮)를 저술했다. 공자는 주공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고,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 수도의 시장격)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다. 이에 노나라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지금의 법무부장관격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의 벼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7화 ◆ 사 신 - 좌청룡 · 우백호 · 전주작 · 후현무 ◆ 사신(四神)은 사령(四靈) 또는 사수(四獸) 라고도 지칭하며 동아시아에서 각 방위를 상징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 편에 앞(남쪽)에는 주작, 뒤(북쪽)에는 현무, 왼쪽(동쪽)에는 청룡, 오른쪽(서쪽)에는 백호가 있다고 사신(四神)을 설명했다. 방위신(方位神)인 사신은 사방의 수호신으로서 군사적으로는 부대의 깃발, 포진에도 응용되었다. 그리고 좌청룡 · 우백호 · 전주작 · 후현무로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고대부터 고분의 내부, 건축물, 동경(銅鏡), 동전(銅錢) 등 방위의 의미를 지닌 특정 공간이나 기물에 사신을 장식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되는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고구려 고분벽화로 요동성총(遼東城塚) 등 4∼5세기 고분에서부터 사신도가 등장한다. 또 천장화의 일상(日像)과 월상(月像), 별자리 그림에서도 사신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청룡(靑龍)은 동방
이낙연은 自省이 먼저다! 광주는 민주주의 성지, 정의의 도시, 평화의 도시, 인권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하여 이곳에 사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상 수 칼럼리스트] 그런데 이 고장 출신인 이낙연 대표의 행보를 보면 동향인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가 그동안 지역민이나 국민들께 큰 기여는 하지 못했을 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지역과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의 뒤처리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낙연 인간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공인으로서 활동을 한 국회의원시절, 전라남도 도지사 시절과 국무총리 시절, 그리고 민주당 당대표 시절 그가 무엇을 이뤄낸 일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뒷마무리를 어떻게 해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대부분 기존 신문에 게재된 자료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형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먼저 이낙연은 국회의원 시절(2000.04.07~2014.05.15)에는 특별한 업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낙연은 2004년 노무현대통령 탄핵안이 나왔을 때 노무현대통령 탄핵을 찬성했을까? 반대했을까? 관심이 있었다. 2004년 3월 12일 탄핵안에 가결에 찬성했나 반대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