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길필용 | 다음 선거가 아닌,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지도자를 기다리며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수많은 ‘정치’를 접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인지, 아니면 그저 권력을 향한 지루한 쟁탈전인지는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흔히 정치 현장에 있는 이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바로 정치꾼, 정치인, 그리고 정치가입니다. 1. ‘생존’에 매몰된 정치꾼과 ‘현실’에 발 묶인 정치인 '정치꾼(Politicker)'에게 정치는 공공의 복리가 아닌 ‘개인의 비즈니스’입니다. 이들의 시계는 오직 당선과 권력이라는 짧은 주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신념보다는 눈앞의 표를, 통합보다는 편 가르기를 선택하며 모략과 선동을 수단 삼아 생존합니다. 그보다 나은 '정치인(Politician)'은 직업인으로서의 소명감을 갖습니다. 현실적인 정책을 고민하고 타협과 협상을 통해 시스템을 굴립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다음 선거'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느라 정작 국가에 필요한 쓴소리를 삼키기도 합니다. 2. 우리가 갈망하는 이름, 정치가(Statesman)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는 세상은
<사법신뢰회복 ⑤> 사법개혁, 무엇부터 사회적 합의를 이룰 것인가 - 사법을 둘러싼 최소 합의의 영역 - 사법개혁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 때마다 사회는 익숙한 피로를 느낀다. 누구의 판결이 옳았는지, 어떤 인사가 정당했는지를 둘러싼 공방이 반복되고, 논의는 곧 정파적 대립으로 흐른다.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로 밀린다. “우리는 무엇에 합의할 수 있는가.” 사법 신뢰 회복의 출발점은 특정 판단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최소 기준을 세우는 데 있다. 사법은 정치의 연장선이 될 수 없다. 동시에 성역으로 남아서도 안 된다. 사법개혁이 번번이 좌초된 이유는 이 두 극단을 오가며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사법을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법이 흔들리지 않도록 어떤 제도를 갖출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첫 번째 최소 합의는 판사 인사권 분산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인사권 분산은 사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법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특정 인물이나 기관에 인사 권한이 집중될수록, 재판의 독립성은 제도적으로 취약해진다. 인사 구조의 분산과 견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기획시리즈<사법 신뢰 회복 ④> 양심의 판사를 보호하지 않는 사법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법의 품격은 제도의 완결성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의 태도와 용기에 의해 완성된다. 아무리 정교한 인사 구조와 충실한 판결문이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양심에 따른 판단을 한 판사가 보호받지 못한다면 사법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 사법 신뢰의 마지막 조건은 바로 여기, ‘사람을 지키는 제도’에 있다. 모든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하도록 헌법상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원칙이 항상 온전히 작동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소신에 따른 판단이 인사상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조직 내에 퍼질 경우, 판사는 자연스럽게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이때 사법은 겉으로는 안정돼 보일지 모르지만, 내부에서는 점차 활력을 잃는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자기 검열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심적 판사가 소수일 때 발생한다. 다수는 무난함을 택하고, 소수만이 문제를 제기하는 구조에서는 그 소수가 고립되기 쉽다. 사법 조직이 이러한 고립을 방치하거나 묵인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기획시리즈<사법신회회복 ③> 설명 없는 판결은 정의가 아니다 사법에 대한 시민의 불신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불신은 대체로 “왜 이런 판단이 나왔는가”라는 질문에 충분한 답을 얻지 못했을 때 축적된다. 패소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설명되지 않는 판결은 납득하기 어렵다. 오늘날 사법을 향한 시민의 질문은 결과가 아니라 이유에 있다. 재판받을 권리는 단지 법정에 설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이 어떻게 검토되었고,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함한다. 판결은 권력의 선언이 아니라 공적 설득의 문서다. 판사가 내린 결론이 시민의 상식과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은 오직 논증과 설명뿐이다. 문제는 설명 책임이 점차 형식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판결문은 길어졌지만, 정작 핵심 쟁점에 대한 판단 이유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대방 주장을 왜 배척했는지, 주요 증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판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을 때, 판결은 공정성보다 자의성으로 읽히기 쉽다. 이때 시민은 사법을 신뢰하기보다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기자 | 기획시리즈-<사법신뢰회복 ②> 판사 인사권 분산이 사법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다 사법에 대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축적된 의문과 실망이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시민은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사법 불신 역시 특정 사건 하나로 설명되기보다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누적된 문제 제기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헌법이 보장한 핵심 가치다. 그러나 독립은 곧 무제한의 권한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립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권한이 어떻게 설계되고 행사되는지에 대한 세심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이면서 효과적인 개혁 과제를 꼽으라면, 판사 인사권의 구조를 점검하는 일이다. 조직에서 인사권은 가장 강력한 권한이다. 사법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판사의 보직 이동, 승진, 주요 재판부 배치는 재판의 내용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인사권이 특정 위치에 과도하게 집중될 경우 재판의 독립성은 제도적으로 취약해질 수 있다. 법관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사권자의 의중을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김필용 |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풍경 하나쯤은 품고 산다. 내게 그 풍경은 사방이 초록으로 물든 황토밭과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의 푸른 물결, 바로 해남이다. 흔히 사람들은 해남을 '땅끝'이라 부르지만,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그곳은 모든 그리움이 시작되는 '시작점'이자 지친 삶을 보듬어 주는 마지막 안식처다. 굽이굽이 흐르는 고천암의 바람과 달콤한 황토의 기억 해남의 공기는 결부터 다르다. 고천암호의 갈대숲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에는 갯벌의 짠 내음과 비옥한 황토의 단내가 섞여 있다. 어린 시절, 빨간 흙을 발가락 사이로 만지며 뛰놀던 그 밭에서 자란 고구마는 세상 그 어떤 진미보다 달콤했다. 곱디고운 손으로 고구마를 쪄주시던 어머니의 미소는 해남의 햇살을 닮아 무척이나 따사로웠다. 대흥사의 고즈넉함과 두륜산이 주는 위로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면 대흥사 십리숲길을 떠올린다.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내뿜는 향기는 복잡한 도시의 소음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가련봉 아래 굽어보는 해남의 전경은 호방하면서도 섬세하다. 산세를 따라 내려오면 만나는 명량의 거친 바다는 우리 선조들의 강인한 기개를 일깨워주며, 고향 사람들의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캄럼니스트 이상수 | 기획시리즈<사법신뢰회복 ①> 법은 왜 존재하는가 - 사법 신뢰 붕괴 앞에서 다시 묻는 질문 - 요즘 대한민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무겁다. 분노라기보다 허탈에 가깝다. 지도층의 정의롭지 못한 행태, 상식을 뛰어넘는 몰지각한 행동들이 반복되면서 “이 나라의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표현은 거칠 수 있으나, 대낮에 흉기를 들고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법과 정의가 공공연히 무시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현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 설명되지 않는 판결이 남기는 상처 특히 사법부를 향한 불신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법의 논리와 상식을 외면한 듯한 판결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 대한 설명마저 충분하지 않을 때 시민들은 패소 그 자체보다 ‘이해할 수 없음’에 더 큰 좌절을 느낀다. 법은 결과 이전에 절차와 논증으로 신뢰를 얻어야 한다. 설명 없는 판결은 설득력을 잃고, 설득력을 잃은 사법은 권위마저 흔들린다. ◆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구조의 문제 오늘의 사법 불신은 일부 판사의 일탈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구조적 문제를 직시해야 한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AI 시대, 인문학은 선택이 아니라 산업의 안전장치다 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는 인간의 예상을 앞지르고 있다. 문서 작성, 번역, 설계, 상담, 영상 편집까지 AI가 해내는 시대다. 많은 이들이 “AI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미래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맞다. 기술은 능력을 제공하지만, 그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AI 시대일수록 더 중요해지는 질문이 있다. “기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세계 어디에 존재하는 산업 활동도 궁극의 목표는 하나다. 바로 “인간을 위하여”라는 목적이다. 기업은 고객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존재하고, 행정은 시민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작동하며,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성장시키기 위해 수행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기술이 대신 답해주지 못한다. 이 질문을 붙잡고 기준을 세우는 일이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다. 1. 기술은 능력을 주지만, 방향은 주지 못한다 AI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이 옳은지 그른지, 답이 인간을 살리는지 해치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김필용 | 우리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한 칸 더 올라가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거나, 상대의 실수를 나의 기회로 삼는 것이 영리한 전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인생을 바라볼 때, 나를 가장 높이 들어 올리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남을 높여주는 습관’에서 나옵니다. 1. ‘겸손’은 전략이 아니라 성장의 토대입니다 남을 높인다는 것은 단순히 예의를 차리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타인의 강점을 발견하고 이를 인정하는 태도는 나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상대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가 가진 장점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나만 옳고 나만 잘났다는 생각에 갇히는 순간, 성장은 멈춥니다. 상대를 높이는 습관은 곧 나를 성장시키는 최고의 학습법입니다. 2. 주변의 지지가 나의 '천장'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일정 높이까지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고지, 즉 '리더'의 위치로 나아갈 때는 주변의 지지가 필수적입니다. 내가 정성껏 높여주었던 사람들이 결국 나의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됩니다. 나로 인해 빛을 본 사람들은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기꺼이 손을 내밀며, 내가 더 높은
패권국의 오만은 어떻게 제국을 무너뜨리는가 ― 트럼프 시대, 로마의 마지막을 떠올리다 ― 이 상 수 / 칼럼니스트 요즘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세계 시민들의 피로감은 상당하다. 갈등은 늘었고, 언어는 거칠어졌으며, 국제 질서는 예측 가능성을 잃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 미국이 있다. 특히 트럼프 정부 시기의 외교와 통상 정책을 떠올리면, 많은 이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패망 직전 상황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로마는 외적의 침입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군사력은 여전히 강했고 영토도 넓었다. 그러나 제국 말기의 로마는 자신이 왜 존중받아 왔는지를 잊었다. 힘은 남아 있었지만 절제가 사라졌고, 규칙을 만들던 국가는 규칙을 무시하는 존재가 되었다. 제국의 몰락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오만에서 시작되었다. 트럼프식 국정 운영의 가장 큰 특징은 의사결정의 단순화다. 국가는 기업처럼 운영할 수 있으며, 손익 계산은 분명할수록 좋다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조차도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기업의 리더가 고려해야 할 변수보다, 국가지도자가 고려해야 할 변수는 수십 배 많다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세계시민에게 보내는 글 ― 강대국의 변덕을 넘어, 규칙과 연대로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 세계는 지금 피로합니다. 전쟁의 그림자, 경제의 불안, 공급망의 흔들림,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은 또 어떤 충격이 올까”라는 불확실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특히 약소국과 중소국의 시민들은 더 민감하게 흔들립니다. 강대국의 한 마디가 환율을 뒤흔들고, 한 번의 정책 변화가 생계의 기반을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계가 더 불안해지는 이유는 단지 힘의 충돌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규칙을 만들던 나라가 그 규칙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할 때 생깁니다. 국제기구, 공동체, 협약, 약속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불공정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그 제도를 붙들어온 이유는 하나입니다. 규칙이 있어야 약한 나라와 강한 나라가 함께 숨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시민 여러분, 우리는 이제 ‘강한 나라가 옳다’는 시대가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나라가 존경받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힘은 잠깐의 승리를 주지만, 신뢰는 긴 평화를 줍니다. 경제도, 외교도, 안보도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트럼프 정부 참모들에게 보내는 글 ― “예스맨”은 지도자를 편하게 하지만, 국가를 위험하게 만듭니다 ― 트럼프 정부의 참모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을 보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 나라의 미래를 보좌하고 있습니까. 권력의 중심 가까이에 있을수록 착각이 생깁니다. “속도가 곧 성과”라는 착각, “강하게 밀어붙이면 해결된다”는 착각, 그리고 “반대는 방해일 뿐”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국가 운영은 기업의 결재 라인과 다릅니다. 국정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제도와 신뢰 위에서 장기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입니다. 참모의 역할은 지도자의 결심을 빠르게 실행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참모의 진짜 역할은 지도자가 놓치고 있는 위험을 경고하고, 국가가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권력은 본능적으로 집중되려 하고, 집중된 권력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지도자를 믿기보다, 지도자가 과도해질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도록 설계된 체제입니다. 지금 세계가 미국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미국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이 강한 만큼, 그 힘이 규칙을 뛰어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