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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검색창에 저당 잡힌 기억, '10초의 자존심'이 필요하다.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우진화 서울시민회 총회장 |


얼마 전, 서울토박이 모임에서 어린시절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들이라지만 나름 대학 강당에 선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대화는 평소와 달리 자꾸만 덜컹거렸다. "그거 있잖아, 왜..."라는 말만 공중에 맴돌 뿐, 정작 주인공인 단어는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누군가는 '시뮬레이션'을 잊었고, 누군가는 '블루베리'라는 평범한 과일 이름 앞에서 멈춰 섰다.

 

 

결국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검색해 볼까?" 이 한마디에 멈췄던 대화가 재개됐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이제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접속'하는 존재로 진화 혹은 퇴화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억의 외출, 검색의 일상화

 

과거에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눈을 감고 끝까지 추적했다. 뇌세포 어딘가에 숨어 있을 단어의 꼬리를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3초를 견디지 못한다. 손가락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다. 기억의 저장소를 뇌가 아닌 실리콘 칩과 클라우드에 통째로 맡겨버린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잊는 단어의 종류다. 소주, 갈비, 불고기 같은 삶의 밀착형 단어들이나 고독, 희망, 불면 같은 감정의 언어들은 여전히 또렷하다. 몸으로 겪고 가슴으로 느낀 것들은 뇌세포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가스라이팅'이나 '메타버스'처럼 머리로만 이해한 유행어들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검색으로 얻은 지식은 뇌에 머물지 않고 검색창 주변을 배회하다 사라질 뿐이다.

 

◆젊은 세대의 '저장 없는 참조'

 

이 현상은 비단 장년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세대는 아예 정보를 뇌에 '저장'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찾으면 된다"는 효율성이 그들의 논리다. 모르는 게 아니라 접속이 안 되는 상태, 즉 와이파이는 신호가 강하지만 정작 생각의 신호기는 꺼져 있는 상태다. 편리함이 기억을 게으르게 만들고, 게으른 기억은 사고의 깊이를 얕게 만든다.

 

◆뇌의 자존심을 지키는 네 가지 제안

 

우리가 단어를 잊는 것은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편하게 살기 때문이다. 기억은 불편함 속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뇌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사유의 근육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해야 한다.


1. 검색 전 10초만 버텨라: 손가락을 움직이기 전, 뇌에게 마지막 기회를 줘야 한다. 그 10초가 뇌를 깨우는 골든타임이다.


2. 입 밖으로 꺼내라: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검색창의 텍스트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뇌를 더 강력하게 자극한다.


3. 쉽게 찾지 마라: 너무 빨리 얻은 정보는 너무 빨리 떠난다. 고생해서 떠올린 단어는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4. 불편을 즐겨라: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가끔은 지도 없이 길을 찾고, 검색 없이 단어를 찾는 수고로움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기억할 필요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며

 

단어를 잃어버리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단어를 찾을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억할 필요가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한 검색 기록만이 남는다.


오늘도 혀끝에서 맴도는 단어 하나를 붙잡기 위해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한참을 끙끙대다 마침내 그 단어를 낚아올렸을 때의 쾌감은,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다시 찾은 것과 같다. 검색창에 저당 잡힌 우리의 기억을 되찾아오는 일, 그것은 단순한 단어 찾기를 넘어 내 삶의 주권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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