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요) 서경별곡과 쌍화점 고려가요3. 서경별곡 서경별곡 / 작가 미상 서경이 서울이지마는 새로 닦은 서경을 사랑하지마는 여의기 보다는 여의기보다는 길쌈베 버리고서리도 사랑해 준다면 사랑해 준다면 울면서 쫓겠나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서경별곡은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여인의 슬픈 심정을 읆은 고려가요이다. 지금의 평양인 서경에서 불린 노래이다. 악장가사(樂章歌詞)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수록되어 전한다. 조선 성조실록에 '서경별곡 같은 작품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종묘악(宗廟樂)으로 불가(不可)하다'고 기록됐다. 후렴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는 북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음악의 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단락은 님이 떠나신다면 베도 버리고 따라가겠다고 한다. 둘째 단락은 구술의 끈처럼 천년을 홀로 지낸다 해도 믿음은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세째 단락은 님을 싣고 떠나가는 뱃사공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평양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으로 비정하며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성이 위치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키기 위해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했다. 고려 3대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하려다
(고려가요) 청산별곡과 가시리 고려가요1. 청산별곡 청산별곡(靑山別曲) / 작가 미상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얄라 가다 보니 불록한 술독에 독한 술을 빚는구나 조롱꽃 누룩이 나를 잡사오니 내 어찌 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얄라 청산별곡은 고려시대 무신정변 시기부터 대몽항쟁 시기까지 사이에 쓰여진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와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악장가사(樂章歌詞) 기록됐다. 1977년에 열린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이스라엘 민요 '밤에 피는 장미'에 고려가요 '가시리'의 가사와 '청산별곡'의 후렴구를 붙여 이명우가 '가시리'로 노래했다. SG워너비가 이명우의 '가시리'를 리메이크하여 불렀다.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극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하는 '옥룡이 나르샤'에서 떠돌이 검객이자 정도전의 호위무사인 이방지가 '가시리'와 '청산별곡'을 섞어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다래는 예로부터 즐겨 먹던 산과일 중의 하나이며 양다래는 중국이 원산이며 뉴질랜드 국조인 키위와 비슷하여 키위라고 부른다. 머루는 옛날 구황식물의 하나로 포도과 산포도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세종대왕 김구 유관순 안중근 등으로 나타난다 때에 따라서 박*리, 김*아, 박*성, 손*민, 조*필, 이*희, 유*석, B*S, 반*문 등 운동선수나 연예인 또는 정치인까지 존경하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종2품 3도 수군절도사로 나라를 구한 난세의 명장이자 성웅(聖雄)이며 사후에 정1품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조선의 기틀을 다지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남북협상을 주도하다가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총격에 사망했다. 효창공원에 안중근 의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와 함께 묻혀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부에 재학 중에 천안으로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현장에서 순국했고 유관순은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없는 묘지에 비석만 세워졌다. 안중근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항일의병에 투신했다.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
설시(舌詩) / 풍도(馮道)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감추면 안신처처뢰(安身處處牢) 몸이 어디에 있든지 편안하리라 풍도(馮道)는 인생살이가 입이 화근(禍根)임을 깨닫고 73세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입 조심 하고 혀를 감추고 말 조심을 처세의 근본으로 삼았기에 난세에서도 영달을 거듭한 것이다. 입을 조심하고, 혀를 조심하고, 말을 삼가하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구한 진리이다. 심신(心身)이 편안한 삶은 말을 삼가하는 것이다. 풍도(馮道)는 882년 태어나서 954년 사망하여 73세까지 장수한 정치가이다. 풍도는 청렴하고 검소했고 지혜가 많았다. 후당, 후진, 요, 후한, 후주 등 다섯 왕조에서 열한 명의 군주를 섬겼다. 30년 벼슬 중에서 20년 동안 네 왕조의 재상을 역임했다. 875년 환관들의 수탈과 횡포에 저항하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 마지막 황제인 9대 애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후량을 건국하여 오대십국 시대(五代十國 時代)가 시작했다. 풍도는 이존욱이 후당(後唐)의 초대 황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김부식이 편찬한 국보 322-1호, 제322-2호 및 보물 제722호 삼국사기는 일연이 편찬한 제306-1호, 제306-2호, 제306-3호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참고(參考) 8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과 관구(管句) 2명(김충효, 정습명)이다.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삼국사기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사회가 동요하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고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년) 완성했으며,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으며,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흥망성쇠의 정사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사대주의 관점에서 중국을 중심에 두고 서술했다. 신라 위주로 기술하여 백제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누락했다. 고조선, 동예, 옥저, 부여, 삼한, 가야, 발해 등의
(유학 특집) 4성 증자와 자사 4성 증자(曾子) 안연(顔淵)는 32세에 요절했고 염백우(冉伯牛)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민자건(閔子騫)은 제자를 두지 않았다 재아(宰我)는 제(齊) 나라에서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됐다. 계로(季路)는 위(衛) 나라에 왕위 계승에 휘말려 살해됐다. 자장(子張)은 고향인 진(陳) 나라로 돌아가 활동했다. 자공(子貢) 자하(子夏) 자유(子游)는 3년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염유(冉有)는 위(衛) 나라에 남아 권력을 향유했다 결국 증자(曾子)가 공자의 적통이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따라 진(陳), 채(蔡)에 갔던 사람은 이제 내 곁에는 한 사람도 없다. (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 공자와 더불어 진(陳) 나라와 채(蔡) 나라에 동행했던 제들을 선정하여 증자(曾子)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포함되지 않았다. 증자(曾子)는 전국시대 노(魯) 나라 산둥성 출신의 사상가로 이름은 증삼(曾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며 존칭으로 증자라고 부른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제자로 제자 중 가장 존경을 받았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했다. 증자는 세계의 모든 것이 결국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 가능하다며 정신을 실
나철(羅喆, 1863년~1916년)은 전남 보성 벌교 출신으로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의 초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29세가 되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호남에서 비밀단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 중국, 일본 3국의 회맹(會盟)을 제안했다. 나철은 1907년 오적암살단을 결성하고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10년 유형을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 지도로 유배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나철은 조선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이 좌절되자 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변경했다. 나철, 대종교 창시하고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순교 나철은 도쿄에서 ‘두일백’으로부터 대종교 창시의 계기가 된 ‘단군교 포명서’를 받았고 서울에서 ‘백전’으로부터 대종교 경전이 된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받았다.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檀君敎)를 공표하고 제천의식을 거
(유학특집) 4성 맹자와 공문10철 4성 맹자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추(邾) 나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여 노나라로 건너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이 되어 6경(六境)을 수학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계승했다. 맹자의 고향인 추(鄒) 나라는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으로부터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 지역을 봉분 받은 제후국으로 주루국(邾婁國)이라 하였다. 전국시대 때 추(鄒) 땅으로 이주하고 국명을 추(鄒) 나라로 변경했고 초(楚) 나라에 병합됐다. 맹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을 위해 묘지에서 시장으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가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전환다. 맹자는 40대에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람하며 제(齊) 나라 제선왕(齊宣王)을 만났다. 제선왕은 맹자 추연 순우곤 등 제자백가를 등용했고 소진(蘇秦)의 주장에 따라 제나라는 조 위 한 연 제 초와 합종하여 진(秦) 나라를 공격했다.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잊혀진 애국지사) 삼의사 백정기 백정기(白貞基)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서 성장했고 19세에 서울로 상경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 전단을 가지고 고향 부안으로 내려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서울 인천 등에서 일본인 및 군사 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일본에 밀항하여 후지산 서쪽의 야마나시현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여 메이지 텐노를 암살하려다가 간토 대지진으로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924년 베이징에서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창립했다. 백정기는 난징으로 거점을 옮겨 조선 중국 필리핀 일본 타이완 베트남 등 대표가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창립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행동대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일본 요인을 암살하고 저격하여 '검은 옷을 입은 공포의 대상'으로 불렀다. 1933년 백정기 정현섭 원심창 등은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주중(駐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암살을 모의
중소벤처뉴스 정길훈 기자 | 김희정 박사 부부클리닉 제3탄 “대화 소통의 기술” <기 고 문> 아름다운 동행 상담센터 김희정 소장 [아름다운 동행 상담센터 김희정 박사 / 소장] 아내는 남편을 만나 알게 된지는 한 5, 6년 되었다. 먼 거리를 마다하고 연애 감정을 키워오다 결혼한지는 1년이 되었다. 남편과 동거 포함 횟수로는 약 3년 정도 되었고, 실제 부부처럼 결혼 생활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5년이다. 차이가 나는 이유는 현재까지도 직장 문제로 각자 떨어져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방에서 친정어머니를 도와 자영업을 하고 있다. 2주에 한 번씩 남편 홀로 살고 있는 신혼집인 서울로 와서 2주 정도 머물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신혼집에서 남편과 생활할 때 아내가 느끼는 감정이 문제였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하였다. 「남편과 아내는 바다로 향하였다. 항해사의 역할을 남편에게 맡기고 바다에 배를 띄워 가는데 항해사로서의 기본을 남편이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항해사이기에 바다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태풍불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과 부통령 이시영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 박은식(朴殷植)은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교유하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향시에 합격하여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를 모신 사당인 숭인전 능참봉으로 재직했다. 박은식은 불혹의 나이가 되자 주자학에 의구심을 갖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했다. 박은식은 장지연 신채호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장지연과 공동 주필이 되어 애국적인 사설을 썼다.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정간당했고 이듬해 복간되었고 한일합방 조약으로 폐간되었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은 영국인 어니스트가 창간하여 조선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환됐다. 해
중소벤처뉴스 류권승 기자 UN에 일본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 투기 반대에 대한 민국 염원을 담아 보내자 -UN에 일본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 투기 반대 진정서 접수하기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면 누구나 ......... 일본 정부는 24일 기점으로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를 시작하였다. 바다는 지구의 한 국가의 소유물이 아닌 전 세계인들의 자산이며, 공동의 재산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바다를 자신의 자산인 것처럼 바다에 핵 오염수를 무단 투기하는 국가가 있다.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이다..... 그들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방류하기 위하여 IAEA에 많은 기부금을 내고 IAEA는 이 것에 화답하기 위해 후쿠시마 핵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이 자료를 가지고 핵 오염수 방류는 정당하다고 하여 핵 오염수 방류를 묵인하고 있다. 그러나 핵 오염수 방류로 인하여 앞으로 어떤 상황이 발생 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한 일드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결과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로 인한 결과인지 아닌지 애매한 결과를 만들어서 일본은 핵